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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첫 노래(장편소설)  
도서출판바람꽃   greendeer@hanmail.net
2020/07/01  
제 목 : 아버지의 첫 노래
지은이: 이강원
발간일: 2020년 6월 29일
정 가: 14,000원
ISBN : 979-11-90910-00-2 (03810)
펴낸 곳 : 도서출판 바람꽃

추천사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그 마을에서 무위의 상태에 이를 때 삶도 죽음도 온전함에 가까이 갈 수 있게 된다. 바라지 가락이 응시한 것, 아버지의 노래가 빚어낸 관음觀音의 풍경은 바로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의 경지였던 것이다. 만인 대 만인의 이리 상태를 방불케 하는 무한경쟁의 분위기 속에서 대부분이 더 많은 땅을 제 영역으로 만들려고 행위 하는 세상의 현실, 게다가 죽음의 의례마저도 자본의 위력 앞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세속의 풍경을 떠올려 보면 작가 이강원이 바라지 가락을 통해 상상한 무하유지향의 서사는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어디에도 없는 마을이지만, 많은 이들이 더불어 꿈꾸는 마을, 그 마을에서라면 노래가 따스한 위로가 되고, 아름다운 감동으로 다가오고, 든든한 평화의 양식이 될 터이다. 이강원의 첫 소설 『아버지의 첫 노래』는 시원의 노래를 상상하며 존재의 시원을 꿈꾼 가작佳作이다.
- 우찬제(문학평론가·서강대학교 교수)


책 소개

『아버지의 첫 노래』는 이강원의 첫 이야기다. 세상의 모든 ‘첫’들이 그렇듯이 작가에게 첫 소설은 그야말로 싱그러운 바람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무한 진통의 소산이다. 때때로 뮤즈의 은총에 힙 입어 일필휘지 쓰이기도 하는 단형 서정시와는 달리 소설은, 특히 단편이 아닌 장편은, 작가의 엄청난 탐문과 산문적 수고를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에 무한 진통의 결과물일 터이다. 그런 진통을 거치면서도 오로지 독자와 교감할 수 있는 나만의 이야기 지평을 형성하겠다는 고유한 원망, 그 떨리는 기대의 대상이 바로 작가의 첫 소설이다.
상금을 내건 장편 현상 공모를 거치지 않고 장편으로 독자에게 첫 선을 보인 사례로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1987),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1990) 등을 떠올릴 수 있는데, 이강원의 『아버지의 첫 노래』도 그 귀한 계보에 속하게 되었다.


책 속으로

어머니는 가끔 ‘키타맨’ 집은 왜 그렇게 우중충한지 모르겠다고 푸념하던데 오늘만큼은 완전히 달랐다. 재색기와지붕과 살구꽃이 상충하면서 뿜어내는 기운은 독특했다. 기와지붕이 고독 속으로 몰두하느라 점점 침잠하고 수축하면서 어두워져 가고 있다면 살구꽃은 융기하고 확산하고 커져가느라 발랄하고 생기로 가득했다. 연분홍 살구꽃잎이 웅크린 기와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기와 속에 있을, 이미 단단하게 굳어버렸을지도 모를 소리들을 끄집어내려는 듯 섬세하게 알랑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금방이라도 소리들이 쏟아질 것 같았다.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고, 어쩌면 태초에서나 비롯할 초롱초롱한 소리들이 들려올 것만 같아 그는 귀를 세웠다(‘선재의 비파’ p.15~16).

아버지는 이 노래를 할아버지에게서 배웠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누구한테서 배우셨어요?” 어린 그가 여쭈었다. “그야 증조할아버지에게서 배우셨겄제.” 아버지가 대답했다. “그럼 증조할아버지는요?” 그가 다시 여쭙자 “허허, 고조할아버지에게서 배우셨을 거고.” 했다. “그럼 맨 처음에는 누가 탔어요?” 그는 또 여쭈었다. “글쎄다. 누굴꼬? 애비 생각에는 요놈이 알 것 같구나. 요놈만이 제가 온 곳이 어딘지 알 테니.” 비파 소리를 앞서가듯 아버지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아빠, 비파에서 아빠 냄새가 나요. 할아버지 냄새도 나고 증조할아버지 냄새도 나는 것 같아요. 여기서요.” 그는 울림통으로 얼굴을 바짝 대고 흠흠, 냄새를 맡으며 재재거렸다. 아버지가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빙긋이 웃었다(‘뿌리 뽑힌 노래’ p.28~29).

“은하야, 일곱 뼘 반이야. 넌 내 손으로 일곱 뼘 반이라고. 너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생각했지…… 이 손은 잊지 않을 거야. 일곱 뼘 반을 절대 잊지 않을 거야.”
선사시대의 사내가 땅바닥에 돌덩이를 던질 때처럼 그는 무작정 거칠었다. 깨진 돌들 중에서 연장으로 쓸 만한 것을 골라 주울 때처럼 신중했다. 촉을 들고 사냥을 나갈 때처럼 경건하고, 사슴을 향해 그것을 던질 때처럼 날렵했다. 잡은 사슴을 집으로 가져와 아내에게 줄 때처럼 의기양양했다. 그의 손은 그의 눈이었다. 그의 손은 귀고 그의 손은 코였다. 그의 손은 입이고 그의 손은 그의 모든 것이었다. 그는 자기 손이 닿을 때마다 그녀가 무엇인가로 새로 태어나는 것 같았다. 무엇인지도 모를 그것은 어딘가로 훌쩍 날아갈 듯 낯설었다. 자부룩 높았다. 까마득하고 어리어리했다. 그는 자기의 전생과 이생을 관통해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수천 년을 기다려온 듯 그녀도 마중했다. 아찔했다. 종잡을 수 없이 복잡하면서도 미묘한 물결이 전신을 휘감았다. 스물일곱 살의 남자는 비로소 고인돌 속에 감추어진 비밀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늪의 비밀까지도. 어쩌면 바다의 비밀까지도(‘선사시대’ p.67).

나무가 넘어지는 건 찰나였다. 찰나 속에는 억겁의 시간이 들어있었다. 찹찹하게 중첩된 시간은 호흡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무는 단번에 고꾸라지지 못했다. 돌았다. 한 바퀴 혹은 반 바퀴. 어지러운 듯, 실신하는 듯 제 시간들을 토해냈다. 토해내며 제 역사의 무게에 눌리듯 쓰러졌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푸,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옥죄어오던 불안과 긴장이 한꺼번에 빠져 나가자 속이 허랑해졌다(‘은하’ p.71).

自는 모든 일이 자기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自에는 얽매임이 없다. 自에는 저절로는 있어도 결코 방임은 없다. 自에는 억지스러움도 없고 自에는 흐트러짐도 없다. 自는 바람보다는 물의 성질이 강하다. 그저 한없이 흘러가는 물처럼 自에는 능동적인 생명력이 꿈틀거린다. 自는 살아있는 활동을 말한다. 自에는 파멸이 아니라 스스로 사라지는, 때가 되면 스스로 거두어가는 적멸이 있을 뿐이다. 自에는 그래서 거스를 수 없는 단호함이 존재한다(‘아버지의 노래’ p.97)

통째로 ‘아버지의 노래’였다. 마을 사람들이 말했다던 바라지가락이었다. 아버지가 임종하실 때 자기 손으로 타던 악보였다. 구음을 적어둔, 그러니까 육보였다. 이것을 당신 앞에 펼쳐놓고 비파를 타보이던 아버지의 모습이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그는 둔중한 무엇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가슴팍을 눌렀다. 뒤죽박죽 헝클어져버린 머릿속으로 아버지의 입소리가 하나씩 둘씩 날아와 박혔다. 글씨는 오른쪽 위에서부터 세로쓰기로 시작하고 있었다. 십육 절지쯤 되는 종이는 수십 장에 달했다. 어디가 먼저인지 어디가 끝인지 표시도 없었다. 세필로 씌어있는 글씨는 분명 아버지의 필체가 맞았다(‘그리고 바라지 가락’ p.148).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결코 사라질 수 없다. 모두 연緣이라는 고리 속에 얽혀들어 있을 뿐. 그 연緣은 다른 누가 주는 것이 아니다. 내 스스로 짓는 것이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이 ‘나’라는 것이 이 세계와 관계하면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말하고 느끼고 생각한다. 심지어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숨쉬기조차도 나의 밖에 존재하는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 안의 공기를 밖으로 내보내는 일 아닌가. 결국 ‘나’라는 것은 이 세계와 관계하면서 만들어내는 오욕칠정, 이 들끓는 움직임일 뿐이다. 고로 ‘나’가 살아있다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오욕칠정이라는 움직임이 밖으로 드러나 활개 칠 때뿐이다(‘이제 십일월은’ p.176).

이제껏 살아왔던 시간들이 빛을 띠기 시작했다. 분노와 울분, 사랑과 비탄, 환희와 절망, 상처와 고뇌와 고통과 두려움과 공포들이 한꺼번에 소용돌이쳤다. 그는 알았다. 이것들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것들 없이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광대한 우주 속에서 단지 아주 희미한 점으로나 존재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 점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이어져 선을 만들고 선은 끝 모를 세상을 연결하는 끈이라는 사실을. 고로 나는 곧 세상이라는 것을, 그는 온몸으로 새롭게 인식했다(‘설연화’ p.204).

줄은 결코 머무르지 않는다. 줄은 줄 전체로 제 안의 소리를 드러낸다는 것을 그는 안다. 줄은 항상 제 몸을 닳려가면서 교감을 원한다. 제 한 가닥을 닳리고 또 한 가닥을 닳리면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다. 비파의 울림통을 탓할 것 없이, 연주하는 사람의 손가락을 탓하지도 않고 오로지 제 몸을 닳려가면서 세상과 일체가 되는 순간을 기다린다(‘삼만 구천이백사십 가닥의 소리와’ p.236).

그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어 앞쪽 멀리 소리의 끝 간 데를 어림잡아 바라다봤다. 경계도 없는 곳, 그 어디쯤으로 날아갈 듯싶은 울림. 산전수전 다 겪고 난 어머니, 푸르뎅뎅하게 흔들리는 스물네 박 한 장단의 떨림. 살아있음의 부질없음과 살아있음의 허허로움과 살아있음의 몸부림으로 헐떡이는, 푸르죽죽하고 푸르데데한 어머니의 숨소리, 그 계면의 여기와 저기. 푸르무레하게, 푸르스름하게, 푸르티티하게, 푸르퉁퉁하게 자지러지는, 푸르락하게, 푸르디푸르게 휘몰아치는 어머니의 숨결(‘시원의 노래’ p.253).

‘아버지의 노래’는 단순히 죽어가는 자를 배웅하는 소리가 아닌지 모른다. 죽어가는 자가, 이생의 기억을 지우려는 것을 도와주려는 소리인지 모른다. 어머니가 저토록 숨을 몰아쉬었다가 한꺼번에 뱉어내는 것도 모두 이승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일 것이다. 숨 속에 이승의 기억이 저장되어 있다고 하지 못할 근거가 어디 있는가. 점점 깊게,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숨소리, 그 결을 따라 흐르는 어머니의 눈물은 정말이지 신산했던 이승의 기억을 여기 이곳에 묻고 가려는 몸부림의 물이다. 그러니 ‘아버지의 노래’는 지우는 자의 노래다. 새로 쓰려는 자의 노래다. 시원으로 향하는 자가 또 하나의 매듭을 홀치는 노래다(‘시원의 노래’ p.260).

‘아버지의 노래’는 여기가 아닌 저기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먼 과거, 아득한 시간 어디쯤에서부터 울려오는 소리, 시원에서 비롯한 소리. 비파는 제가 떠나온 곳을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처음으로 소리가 시작되는 곳이라고, 자기 어머니가 가실 곳이라고 말하던 선재의 목소리가 ‘아버지의 노래’ 선율처럼 가슴속으로 굽이쳐왔다.
별안간 마을이 환해졌다. 웬일인가 싶어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선재네였다. 기와지붕을 뚫고 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빛은 커다랗고 둥그렇게 뭉치면서 오색찬란한 자태로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버지의 노래’도 흘렀다. 바람처럼 가볍게 빛 덩이 속으로 스며들었다. 빛이 된 노래는 요강바우재로 날았다. 어긔야 어강됴리, 나난구리를 향해 솟아, 날았다(‘처음으로 소리가 시작되는 별’ p.306~307).


출판사 서평

시원의 노래와 존재의 시원

1. 바라지 가락과 생명의 리듬

『아버지의 첫 노래』는 우리에게도 상여소리 말고 다른 음악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것, 죽음을 보살피고 애도하는 그 바라지 가락이야말로 존재의 시원으로부터 발아되어 그 시원으로 다시 돌아가는 생명의 리듬에 걸맞은 소리였을 것이라는 상상에서 비롯된 이야기다.
작가는 소설의 첫 머리에서 독자들을 백제금동대향로 앞으로 안내하는데, 그 향로에서 다섯 명의 악사도 그런 음악을 연주하지 않았을까, 혹시 ‘정읍사’도 그런 경우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엮어나간다. ‘정읍사’의 관악부가 지금까지 전래된 ‘수제천’으로 이어지고, 현악부가 바라지 가락으로 갈라져 나왔을 것이라 가정하고, 주인공 이선재를 통해 그 바라지 가락을 탐문하는 과정의 이야기를 촘촘하게 형상화했다. 이선재 가계로 내려오다가 돌연 중단된 바라지 가락을 그가 다시 이어가는 과정과 아울러 연구자인 오무진이 그 가락의 해석적 맥락을 보충하는 것으로 작가의 가정과 추론에 설득력을 더해 간다. 그 결과 작가가 형상화한 ‘아버지의 노래’는 이런 가락이다.

‘아버지의 노래’는 여기가 아닌 저기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먼 과거, 아득한 시간 어디쯤에서부터 울려오는 소리, 시원에서 비롯한 소리. 비파는 제가 떠나온 곳을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처음으로 소리가 시작되는 곳이라고, 자기 어머니가 가실 곳이라고 말하던 선재의 목소리가 ‘아버지의 노래’ 선율처럼 가슴속으로 굽이쳐왔다. 별안간 마을이 환해졌다. 웬일인가 싶어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선재네였다. 기와지붕을 뚫고 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빛은 커다랗고 둥그렇게 뭉치면서 오색찬란한 자태로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버지의 노래’도 흘렀다. 바람처럼 가볍게 빛 덩이 속으로 스며들었다. 빛이 된 노래는 요강바우재로 날았다. 어긔야 어강됴리, 나난구리를 향해 솟아, 날았다(306~307쪽).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자세히 해설할 필요도 없이 여기서 ‘아버지의 노래’는 시간적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 공간적으로 차안과 피안을 넘나들며 공현전하는 가락이다. 지금 여기의 순간과 시원의 영원 사이를 교감하며 스미고 짜인다. 어둠에 빛을 선사하는 별의 지도가 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가락은 역동적인 생명의 리듬이다. 존재의 숨결이다.

2. 생의 비의秘意를 탐문하는 소리

그렇다면 왜 바라지 가락인가? 왜 죽음을 보살피는 노래인가? 그것은 죽음을 통해 삶과 존재 전체의 비밀을 거듭 심원하게 탐구하기 위한 근원적 성찰의 일환으로 보인다. 소설에서 선재는 환각처럼 매월당의 질문을 받는다. “너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느냐. 네가 서있는 곳은 어디냐. 너는 지금 어디로 가려 하느냐. 네가 가려는 곳은 네가 진정으로 가고자 하는 곳이냐.”(100쪽). 바로 답을 하지 못한 그는 끊임없이 그 질문을 찾아 나선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어디로 가고자, 어떻게 살고자 몸부림치는가…… 내 삶의 비밀은 내게 있다. 나만이 안다. 나만이 그 비밀을 캐낼 수 있다.”(173쪽) 선재는 생의 비의를 탐문하는 단초가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절감한다. 당연한 것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지극히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유예되는 진실, 그러기에 조금도 그 중요성이 덜해지지 않은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말하자면 낯설지는 않되, 익숙한 질문이되, 그 답을 구하기 어려워, 줄곧 충격을 주는 과제가 바로 이것 아니겠는가. 그 질문에 마주한 작가 이강원의 성찰은 참으로 어지간하다. 自는 모든 일이 자기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自에는 얽매임이 없다.

自에는 저절로는 있어도 결코 방임은 없다. 自에는 억지스러움도 없고 自에는 흐트러짐도 없다. 自는 바람보다는 물의 성질이 강하다. 그저 한없이 흘러가는 물처럼 自에는 능동적인 생명력이 꿈틀거린다. 自는 살아있는 활동을 말한다. 自에는 파멸이 아니라 스스로 사라지는, 때가 되면 스스로 거두어가는 적멸이 있을 뿐이다. 自에는 그래서 거스를 수 없는 단호함이 존재한다(97쪽).

인용문과 같은 사려 깊은 성찰은 이 소설의 여러 곳에서 순금처럼 빛난다. 작가는 이런 성찰을 위해 멀리 서서 바라보고 심연의 뿌리처럼 사유하고 오래도록 고뇌한다. 그래야 조금 더 온전한 실체에 접근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신화적이고 우주적인 성찰과 아울러 민속학적 음악적 탐문 또한 상당한 수준이다. 그 자신의 음악적 추론을 자연스럽게 풀어가기 위해 많은 자료를 섭렵하고 체험하면서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되도록 소리의 숨결을 살렸다.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작가가 얼마나 많은 공력을 들였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은 그 외에도 많다. 앞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첫 노래』가 잃어버린 바라지 가락을 재구성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라고 했다. 잃어버린 가락을 되찾아가는 과정은 곧 잃어버린 언어를 복원해 가는 과정과 맞물린다. 주인공 선재는 남다르게 토박이말에 관심이 많은 인물로 그려진다. “중고등학교 때와 대학 다닐 때, 그 이후로도 간간이 새로 듣게 된 우리말이나 잊힌 단어들을 찾게 되면” 노트에 적어두었으며, “마을 어른들이 쓰는 사투리들도 기억해뒀다가 메모해두곤 했다”는 선재는 그렇게 개인적으로 “일종의 사전”을 만들어왔다(129쪽). 가령 다음과 같은 식이다.

고잔잔하다: 잔잔하다 못해 침울할 정도로 고요하다. 고는 苦인지도 모름
신푸녕스럽다: 근심걱정이 너무 많아 사소한 일도 돌아볼 여유가 없다
무장무장 = 서나서나 = 시나브로
애젖하다: 몹시 애가 타다
꽃잠: 숙면 또는 첫날밤(은하)
인연 = 인다라망 = 관계 = 고리 = 업 = 원인과 결과의 되풀이 = 윤회 ↔ 해탈
횟대 = 말코지. 끈이나 나무를 벽에 가로로 쳐놓아 물건을 걸 때 씀(290~291쪽)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흐놀다’ ‘흔뎅거리다’ ‘호아가다’ ‘허대다’ ‘물이못나게’ ‘처설프게’ ‘앓음답다’ ‘나난구리’ 등등의 여러 단어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작중 무진이 말했던 것처럼, “사전에 안 나온 말들이 얼마나 수두룩한데요.”(286쪽)라며 사전을 찾아보았을 터이다. 이런 점에서도 작가 이강원의 미덕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무릇 작가란 잃어버린 겨레의 혼과 말을 복원해내는 영매자이기도 한 까닭이다. 이강원의 언어 탐구는 너무나도 쉽게 쓰이는 요즘의 소설 창작 환경을 생각하면 아주 소중한 미덕 중의 미덕임에 틀림없다.

3. ‘줄’의 사상과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이 소설에서 죽음을 보살피는 바라지 가락은 ‘아버지의 노래’로 불린다. 선재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조부의 아버지, 증조부의 아버지…… 그렇게 시원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윗대부터 있어왔던 가락으로 얘기된다. 그러나 그 ‘아버지의 노래’로 인해 선재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불행, 그리고 선재의 울분과 절망, 분노, 이웃의 오해와 갈등으로, 가락은 중단되고 만다. 바라지 가락을 떠나 배회하고 방황하며 성찰하던 선재는 고통의 통과제의를 거쳐 다시 비파를 타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자기 안에서 이전과는 다른 ‘아버지의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울분과 절망과 분노로 뒤범벅 돼버렸던 아버지의 노래는 자기에게서 떠난 지 오래고 지금은 그것들에서 벗어난 소리, 울분과 절망과 분노들을 품은 소리로 들려왔다. 그는 ‘아버지의 노래’가 자기 안에서 강물로 넘실거리는 것을, 바다로 흘러가는 것을 바로 보게 되었다.”(231쪽) 그렇게 되찾은 ‘아버지의 노래’로 선재는 어머니를 잘 보내드릴 수 있게 된다. 마을 공동체도 이전의 갈등을 넘어서 그 가락과 더불어 치유의 지평으로 나가는 것처럼 얘기된다. 이 소설에서 가락은 나 개인의 존재론적 시원을, 그리고 공동체와 민족의 시원을 떠오르게 하는 상상의 탈것이다. 그 가락을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스스로를 비우고 텅 빈 충만의 세계로 입사할 수 있게 된다. 그런 면에서 작가 이강원이 제시한 ‘줄’의 사상이 주목된다. 울림통을 통해 소리와 가락을 빚어내는 현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성찰하고 있는데, 이 소설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줄은 결코 머무르지 않는다. 줄은 줄 전체로 제 안의 소리를 드러낸다는 것을 그는 안다. 줄은 항상 제 몸을 닳려가면서 교감을 원한다. 제 한 가닥을 닳리고 또 한 가닥을 닳리면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다. 비파의 울림통을 탓할 것 없이, 연주하는 사람의 손가락을 탓하지도 않고 오로지 제 몸을 닳려가면서 세상과 일체가 되는 순간을 기다린다(236쪽).

이렇게 머물지 않고 제 몸을 닳려가면서 소리를 내는 줄, 그러니까 제 몸을 내주면서 교감의 소리를 펼치는 줄, 울림통이나 연주자의 손을 허물하지 않고 오로지 제 온몸을 내주면서 세상과 일체가 되는 순간을 기다린다는 줄…… 작가 이강원이 상상한 ‘아버지의 노래’는 그런 줄에 의해 비로소 울림의 가능성을 연다.
그리고 그 울림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로 하여금 어디에도 없는 마을, 『장자』에 나오는 그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을 떠올리게 한다.
― 우찬제(문학평론가·서강대학교 교수)



어렸을 때 나는 동네 뒷동산에 자주 올라 다녔다. 소나무 아래 앉아 흘러가는 냇물을 굽어보는 게 좋았다. 한 번은 그 냇물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 따라갔다. 얼마쯤 갔을까. 느닷없이 호수가 펼쳐지고, 내내 함께했던 냇물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스름이 밀려오는 호숫가에 서서 바짓가랑이가 축축해지는 것도 모르고 마냥 울었다. 저수지 아랫마을 아저씨 자전거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가 눈물을 훔치며 꾸짖었다. 신림저수지까지는 십 리 길이라고. 그 먼 데를 왜, 뭐 하러 갔느냐고.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닐 때는 늦게까지 교실에 남아 있은 적이 많았다.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 책가방을 메고 텅 빈 운동장을 나서면, 어느새 길어진 느티나무 그림자가 왜소한 내 그림자 옆으로 다가와 나란히 서곤 했다. 교실에 풍금이 있는 날에는 짧고 뭉툭한 손가락으로 ‘시인의 마을’이나 ‘긴 머리소녀’를 치느라 날이 저무는 것도 잊기 일쑤였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하숙이나 자취를 제외하고는 막차를 타고 귀가할 때가 잦았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교실 창문에 기대어 앉아, 코끼리산 언덕 모퉁이 길을 하염없이 건너다보았다. 때로는 내장저수지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천변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뒷동산에 오르거나 교실에 앉아있거나 천변을 걸을 때, 나는 대개 혼자였다. 혼자 있으면서도 홀로이고 싶었다. 홀로일 때라야 내 가슴은 무언가로 충만해졌다.

『아버지의 첫 노래』는 ‘홀로’와 ‘무언가’가 낳은 내 생애 첫 노래이다.

앞으로도 나는 ‘홀로’와 ‘무언가’에 기대어 노래할 것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이강원 작가는
1964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지금은 백제의 고도 부여에 살고 있다.
원광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하였으며, 《21세기 부여신문》에 『아버지의 첫 노래』를 연재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 차례 】

선재의 비파 7
뿌리 뽑힌 노래 25
선사시대 48
은하 69
아버지의 노래 88
그리고 바라지 가락 117
이제 십일월은 152
설연화 189
삼만 구천이백사십 가닥의 소리와 2 06
시원의 노래 251
처음으로 소리가 시작되는 별 262
해설 | 시원의 노래와 존재의 시원 | 우찬제 309
작가의 말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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